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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날아오르는 학처럼

일요일 - 2013년 9월 29일 10:55

교수이자 인민 교사인 황 누 마이는 1919년 8월 6일 하노이 탄찌 현 리엔닌 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박장 초등학교와 하노이 바오호 고등학교(부오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1939년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인도차이나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1년 후 법학대학교로 편입했습니다(건강이 좋지 않아 낙제했습니다). 1943년에는 동하이 사립 고등학교(하이즈엉)에서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1945년 8월 하노이 봉기에 참여했습니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그는 다오 몽 롱, 시 티엔 등의 예술가들과 함께 독립극단에 합류했습니다. 이 극단은 중부 지방을 순회하며 프랑스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선전하고 격려했습니다. 1948년에는 흥옌성 저항문화협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이후 판탄 고등학교(타이빈) 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51년부터 1952년까지는 비엣 박 사범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는 중앙 중등 사범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1958년부터 1980년까지는 하노이 이과대학교 문학부에서 강의했습니다. 1981년부터 1990년까지 그는 호치민시 과학대학교(현재 호치민시 국립대학교 사회과학인문대학교) 문학부-언론학부에서 가르쳤습니다. 1988년부터 그는 호치민시 문학 연구 및 교육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은퇴 후, Hoang Nhu Mai 교수는 호치민시의 Van Hien 사립대학교 교장과 Truong Vinh Ki 사립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1984년에 Hoang Nhu Mai 교수는 교수라는 칭호를 받았고 1990년에는 인민 교사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항 전쟁과 국가 건설에 기여한 공로로 Hoang Nhu Mai 교수는 2급 반프랑스 저항 훈장(1961년), 1급 반미 저항 훈장(1985년), 1급 노동 훈장(1995년)을 수상했습니다.

1943년 교육계에 입문하여 지금까지 정확히 70년을 헤아려 보면, 호찌민 주석의 가르침처럼 "10년을 위해 나무를 심고, 100년을 위해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말씀처럼, 황 누 마이 교수는 인재 양성에 헌신해 왔습니다. 황 누 마이 교수는 교사이자 문화·사회 운동가이며, 다재다능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2005년 교육출판사에서 쩐 후우 타 부교수가 선정하여 소개한 『황 누 ​​마이 선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문학적 삶을 담은 작품으로, 높은 질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연구 및 비평)에는 문화, 문학, 그리고 연극 개혁에 관한 연구 자료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2부(회고록과 창작)에는 회고록, 동화, 희곡,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황 누 마이 교수님의 제자 세대이자, 1945년 이후 베트남 현대 문학을 가르쳤던 동료로서, 저는 1961년 교육출판사에서 출간된 『현대 베트남 문학(1945-1960)』이라는 교과서를 접하며 선생님의 "깨진 고랑"을 느낄 수 있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하노이 대학교 문학부 학생들은 비단처럼 은발에 빛나는 눈, 맑고 따뜻한 목소리, 여유로우면서도 무대 위의 예술가처럼 학구적인 학생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선생님의 강의에서 갑자기 "날개가 돋아나는" 시와 산문을 통해 조국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주는 선생님의 모습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청중을 사로잡는 비결은 다름 아닌 사람과 삶에 대한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넓고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거만하게 말하지 않았고, 학문적인 방식에도 서툴렀으며, 가장 복잡한 것을 단순하고 정직한 것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움은 단순함이며, 진실은 언제나 단순함입니다. 1986년, 하노이 대학교 문학부 창립 30주년을 맞아 그는 동료 및 학생들과 함께 큰 명절을 맞아 호찌민에서 왔습니다. 그의 옆에 서니, 마치 그가 10월의 추운 날씨에 남쪽의 햇살과 바람 부는 땅의 온기를 북쪽으로 옮겨 온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단순하고 진솔하며 감동적인 시를 썼습니다. "스승님들, 돌아가셨고 살아계십니다/ 전장에 묻힌 학생들/ 30년의 여정/ 이곳으로 돌아오니 슬픔과 기쁨이 함께합니다/ 함께 향을 피우자/ 세상을 떠난 이들이여, 이곳으로 돌아오자"(문학부 귀환). 『황 누 마이 시집』에는 그의 시 36편이 선정되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들을 읽을 기회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과 사람에 대한 열정을 지닌 그의 시적 영혼을 발견할 것입니다. 기교는 없고 이념에도 낯설어 보이는 그의 시는 삶에서, 결코 지루하지 않은 삶에서 솟아납니다. 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오늘날처럼 건강하고 지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삶의 낙관주의와 기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님께서 70년 동안 헌신하신 인재 양성의 길은 교훈이자, 후대 젊은 스승들에게 빛나는 본보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스승님께서 교육의 시작부터 끝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스승의 깊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를 만들어내시면서 학교와 사회의 연결에 대한 깊고 강한 인식을 항상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승님께서 제가 가르침을 받을 때 제게 일깨워 주시던 말씀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이론은 회색이지만 생명의 나무는 영원히 푸르다." 저(그리고 다른 많은 동료들)가 스승님의 지도를 받던 시절, 스승님은 여전히 ​​자신을 인내심 많은 나룻배 사공, 영원한 정원사로만 여겼습니다. 그런 겸손한 자질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스승님의 이력을 살펴보면 누구나 아주 단순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생의 성공은 "운명"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승님의 지칠 줄 모르는 노고를 통해 저는 그것이 고된 노력과 인내의 결과이며, 정의와 아름다움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강한 믿음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스승님의 삶은 단순하고 순탄치 않았습니다. 향기로운 꽃들이 가득한 길을 걷고, 황홀한 노래로 가득 찬 길을 걸으셨을 뿐입니다. 스승님과 오랜 세월 함께하며 저는 스승님 자신도 평안하시고, 인생의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보다 더 큰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스승님께서 슬퍼하시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더욱이 "극도의 비참함"에 빠지시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패배를 승리로 바꾸는 마법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승님은 마음의 균형을 맞추는 법을 알고, 삶의 "문턱"을 잘 알고, 불교의 정신에 따라 조화롭게 "주고받는" 법을 알고 계십니다. 진실로, 지금 이 순간, 저는 스승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아주 단순한 것, 스승님이 우리 가운데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해 묵상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로병사"라는 가혹한 자연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저항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마지막 인간이 땅으로 돌아가는 날, 아마도 "사람은 땅의 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황 누 마이 교수님은 2013년 9월 27일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 글은 마치 스승님, 여러분의 영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영혼에 바치는 향과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 안에는 갑자기 두 가지 특별한 감정이 뒤섞입니다. 슬픔과 자부심입니다. 대문자로 쓰인 인간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슬픔과, 이 세상이 한때 교수님, 인민의 스승 황 누 마이와 같은 인간을 낳았다는 자부심입니다.

작가:부이 비엣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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